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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4.07.16 - [공감] 당신의 삶을 내 예술작품으로 만들어도 될까요

하미나 <아무튼, 잠수> 저자

 

1993년 어느 가을날 바하칼리포르니아의 판자촌에서 두 여성이 만났다. 휴가를 보내던 미국인 사진작가 애니 아펠 그리고 벽돌공 남편에게 점심식사를 가져다주던 만삭의 마리아였다. 애니는 마리아에게 사진을 몇 장 찍어도 되냐고 물었고 마리아는 좋다고 답했다. 애니는 휴가에서 돌아온 뒤에도 멕시코에서 만난 한 가족이 계속 떠올랐고 다시 돌아간다.

 

마리아를 찍은 사람은 많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애니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애니의 멕시코 프로젝트는 계속해서 늘어난다. 아무리 찍어도 마리아의 진실을 담았다고 확신할 수가 없어서였다. 마리아가 벽돌공 남편과 헤어지고, 마리아의 아이가 아이를 낳고, 또 그 아이가 미국으로 가며... 세월이 흐른다. 애니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25년간 2만 3000 프레임으로 찍는다.

 

레슬리 제이미슨의 <비명 지르게 하라, 불타오르게 하라>에 수록된 '최대노출'에 등장하는 이야기다. 레슬리는 애니의 시선 앞에서 자신의 글의 초라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쓴다. "'그게 존중이야'하고 나는 생각했다. 보는 것, 계속해서 보는 것, 필요한 걸 얻자마자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 존중이란 피사체가 늙어가는 모습을, 점점 더 복잡해지는 모습을,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위해 내러티브를 전복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일이다."

 

레슬리는 책에서 집요하게 묻는다. 타인을 내 글에 불러들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특히 타인과 나 사이에 권력 차이가 명확할 때,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정말 이게 다인가?

 

타인의 이야기를 쓰는 것과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 달라보일 수 있지만 사실은 비슷한 면도 많다. 언제나 진실에 도달하는데 실패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최대한의 진실에 가깝게 쓴 뒤에도, 턱끝까지 숨차게 시도를 해도, 돌이켜보면 어딘가에 빈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게 전부가 아닌데... 내 기억은, 이 사람의 모습은 이게 전부가 아닌데... 내게는 이러한 균열과 빈틈이 더 진실하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레슬리 제이미슨이 알코올중독 경험과 회복의 과정을 담은 자전적 회고록 <리커버링> 이후에 이 책을 쓴 것은 자연스럽다.

 

3년 전 나도 첫 책을 쓰며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심한 우울증을 겪는 여성 30여 명의 이야기를 수집해 글로 쓰고 있었다. 아픈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내 질문했다. 이 이야기를 도대체 어떻게 담아야 할까? 이 이야기는 이 여자의 이야기와 얽힌 다른 인물의 이야기와는 다를 수 있다. 이 여자가 과거와 미래에 하는 이야기와도 다를 수 있다. 이야기를 듣는 나의 해석과도 다를 수 있다. 이 중에 무엇이 더 진실한가? 도무지 대답을 내릴 수 없는, 이 위험한 질문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이 여자에게 왜 필요한가? 이들은 살기 위해 말하고 있었다. 자신을 구출하기 위해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들과 같이 우울증을 겪으며 책을 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애니의 멕시코 프로젝트가 아름다운 이유는 애니가 찍은 마리아 가족의 모습이 아릅답다거나, 애니가 찍은 마리아 가족의 모습이 '더' 진실되어서가 아니다 애니의 프로젝트가 아름다운 것은, 마리아를 알고자 하는 애니의 끈질긴 갈망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레슬리 제이미슨의 <리커버링>이 아름다운 것은 알코올중독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살리기 위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우리는 살기 위해서, 스스로 구출해내기 위해서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니 타인으로 예술작품을 만들 때 문제가 되는 것은 타인에 대해 쓰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를 왜 어떻게 쓰느냐다. 당신의 삶을 나의 예술작품으로 만들 때, 작품이 말하는 것은 '당신의 삶'이 아니라 당신의 삶을 특정한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나'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