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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4.07.15 -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듯, 상식은 만인에게 자명하다[왜냐면]

한명식 ㅣ 대구한의대 교수

 

답답한 영화 한 편 때문에 밤을 꼬박 설쳤다. 2009년 이탈리아에서 마약 혐의로 체포되고 구치소에서 숨진 한 남자의 실화 사건을 그린 영화였다. 마약 전과가 있는 주인공은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살려던 젊은이였다. 하지만 어느 날 친구와 차 안에서 대마초를 피우다가 군경찰에 체포되고 최소한의 방어권도 없이 이곳저곳 끌려다니며 얼굴에 심한 피멍이 들고 허리도 펴지 못하는 상태로 전락한다. 그 과정에서 교도관, 의사, 변호사, 재판관은 외적으로 확연한 상처의 원인을 적극적으로 캐묻지도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 자신도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다며 체념처럼 둘러댄다.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치료까지 거부한다. 그러고는 결국 고통스럽게 혼자 죽는다. "다 알면서 뭘 물어봐!" 식의 말투와 화면 속 정황들이 그런 사실을 에둘러 말해준다. 그렇다면 영화는 만연한 공권력의 폭력을 고발하는 것일까? 그것도 지금의 이탈리아 현실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이상하고 답답했던 이유는 영화가 끝나고서야 납득되었다. 제목이 '나의 피부로'인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피부에 드러난 짙은 멍 자국은 누구도 부정 못 할 군경찰위 폭행 흔적이며 그 자체로 그가 겪은 모든 사실을 증거한다. 하지만 상황 속에서 그런 명백함은 외면되고 무시된다. 주인공을 심문하는 재판관 뒤에 걸려있는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라는 문구가 이 모든 사실을 역설적으로 은유한다. 이 영화가 단순히 공권력의 폭력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이 납득되는 부분이다. 영화가 말하려는 본질은 이런 부조리의 답답함이 결코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런 자기방어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체포와 폭행, 이해할 수 없는 가족의 면회 요청 거부, 관계자들의 나른한 방관과 조직만을 생각하는 직업윤리는 단순히 공권력의 폭력성만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전쟁이나 폭력의 시대에나 있을 법한 이러한 비상식은 지금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엄연한 사실이다.

 

보여주기식 성과를 위해서 최소한의 안전 장비도 없이 어린 군인을 급류 속으로 들여보내 숨지게 한 사건과 그 처리를 두고 "그만한 일로 사단장을 처벌하면 누가 사단장을 하려고 하겠느냐?"는 대통령의 격노. 이를 편 들고 감싸려는 참모진의 상식이 그런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린 군인의 비통한 죽음을 '그만한 일'로 치부하는 대통령의 상식은 할 말을 잊게 만든다. 뿐만 아니라 인증 절차를 통해 동의한 100만 명 넘는 대통령 탄핵 청원을 간첩에 의한 민심 선동으로 정의하는 일부 언론의 상식도 기가 막힌다.

 

'문제는 숨겨진 채로 작동하지 않는다'라는 슬라보예 지젝의 말이 떠오른다. 영화 속 주인공이 당한 폭행과 부조리의 증거가 생생하게 피부에 드러나듯 지금 우리를 분노케 하는 문제들은 숨어 있거나 잠재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통찰이나 숙고 같은 고차원적인 관심도 필요치 않다. 눈앞에 보이는 괴이한 비상식의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 그것이 곧 문제의 발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리분별이고 보편적 상식이다.

 

피부에 드러난 멍 자국은 그 자체로 폭력의 결과이다. 무섭게 흐르는 물속에 가라앉은 군인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듯 상식은 만인에게 자명하다.

 

 

대통령이나 되는 사람이 국민 목숨을 급을 나누어 저런 식으로 말하는게 21세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싶다. 도대체 대통령이 어떤 자리라고 생각하는지.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으로만 생각하는 걸까? 

왜 저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는지, 이제는 상식을 초월하는 행동을 하는 대통령이 원망스러운 걸 넘어 그 사람을 뽑은 국민들이 더 원망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