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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4.08.03 - [한마당] 김예지 신드롬

태원준 논설위원

 

 

영화 '더 킬러'의 준인공 킬러는 저격소총 조준경에 눈을 대고 끊임없이 되뇐다. '예상은 하되, 임기응변 말고, 계획한 대로, '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당초 계획에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이 말처럼, 데이비드 핀치 감독은 킬러를 엄청난 인내가 요구되는 직업(?)으로 묘사했다. 같은 자리에서 타깃이 나타나기를 며칠씩 기다리고, 나타나면 최적의 과녁에 들어오기를 또 기다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왔을 때도 방아쇠를 당기는 손가락이 흔들리지 않도록 냉정을 유지해야 한다.

 

기다리고, 쏘고, 사라질 때까지 영화 속 킬러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는데, 그런 얼굴을 며칠 전 파리올림픽에 사격장에서 게계가 보았다. 김예지 선수는 공기권총 10m 개인전에서 안드로이드 로봇이 총을 쏜다면 딱 그렇지 싶은 무표정한 얼굴로 과녁을 겨눴다. 유독 오래 조준하며 기다리고, 쏘고, 점수를 확인할 때까지 미세한 변화도 없던 그 모습이 세계인을 열광케 했다. 영상은 수천만 건 조회됐고, 각국 네티즌은 "암살자의 표정을 보았다" "미래에서 온 여전사일 것이다" "액션영화에 캐스팅하라" "세계 선수 중 가장 쿨하다"면서 감탄사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부터 패션잡지 GQ까지 '김예지 스타일' 분석에 나섰는데, 한 매채는 영화 '레옹'의 뤽 베송감독을 거론했다. "그의 영화 속 킬러들이 특이한 사물에 애착을 보이는 것처럼(레옹이 화분을 들고 다니듯), 김예지도 허리춤에 코끼리 인형을 찼다."그것이 행운의 마스코트인 다섯 살 딸의 인형임이 알려지자 이번엔 "김예지도 엄마였어!" 하는 놀라움이 터져 나왔다.

 

그를 파리의 스타로 만든 '무표정'은 아마 사격이란 스포츠의 특성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유도나 축구나 수영처럼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대다수 종목과 달리 사격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아야 당초 계획 대로 집중해서 과녁을 맞힐 수 있다.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애려 '격렬하게' 자신을 통제해 온 노력과 집념이 그런 얼굴을 빚어냈다. 암살자의 표정도 스포츠에선 이렇게 멋질 수 있다.

 

 

난 올림픽 경기를 보지 못했지만 사진으로 봤는데 포스가 장난 아니긴 하드라. 말 그대로 여전사라 해야하나. 카리스마 넘치는 게 지나가는 개의 시선도 끌만했다. 멋졌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