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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4.07.30 - 여름철 왕 건강 책임지던 '겉차속따' 제호탕의 비밀[이상곤의 실록한의원]

뜨거운 복날에 삼계탕을 먹듯 여름 건강의 핵심은 속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조선 최장수 왕이었던 영조 재위 20년 영의'라고 영의정 유척기는 임금의 여름 건강을 염려하면서 "비가 내린 뒤 찌는 무더위가 심해졌는데 밤사이 성상의 체후는 어떠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영조는 "제호탕(醍醐湯)은 평상"라고 흡족해한다.

 

'제호(醍湯)'는 불경과 힌두교 경전에 나오는 유제품으로, '고된 과정을 오랫동안 거쳐 얻은 신성하고 존귀한 최고급의 물건 또는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한의서인 '본초강목'에는 "불경에 다르면 젖으로 락(酪)을 만들고, 락(酪)으로 수(酥)를 만들고, 수(酥)로 제호를 만든다"고 쓰여 있다. 지금으로 따지면 버터와 비슷한 것으로 짐작된다.

 

숙종 44년 '승정원일기'의 기록에도 제호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형태나 맛이 참기름과 비슷한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숙종은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제호를 먹었는데, 쉽게 투과하는 성질을 이용해 백회혈(百會穴)에 제호를 바르는 방법도 활용했다고 한다. 제호는 이외에도 기침 등의 호흡기 질환 및 피부 가려움증을 치료하는 약물로 활용됐다.

 

하지만 제호는 조선시대에는 거의 사용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소젖 서른 말로 한 되가량의 제호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제조 과정이 어렵고 당시 젖소도 없는 상황에서 다량의 우유를 확보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호는 임금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으로 대접받았다. 영조가 먹었다는 '제호탕[은 단오 때 임금에게 진상했던 청량음료로, 소젖으로 만든 '제호'나 '제호고'와는 구별된다. 주로 여름 갈증 해소에 쓰인 처방이며 '오매' '백단향' '사인' '초과' 등 4가지 약재로 구성된다. 그중 덜 익은 매실을 훈증한 오매(烏梅)가 핵심인데, 풋 익어 독이 있는 푸룬 매실을 불에 구워 말린 것이다.

 

매실은 구연산 함유량이 많아 예로부터 식중독 예방과 찬 음식을 먹고 배탈에 쓰인 약재였다. 구연산은 실제 해독과 강한 살균작용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방에선 오매를 가슴이 답답하며 화가 올라오는 증상을 안정시켜 심장을 보호하는데 쓰였는데 그 효과가 좋다. 실제 '동의보감'에는 "오매를 차로 마시면 시장을 안정시켜 잠을 잘 오게 한다"는 기록이 있다.

 

오매와 함께 '제호탕'에 들어간 약재인 '백단향' 또한 배탈 치료에 주로 쓰였다. 백단향은 박달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단향나무과의 식물로, 위장의 활동을 좋게 하며 찬 음료나 한기가 맺혀 명치가 아픈 곽란, 토사, 복통 증상을 치료한다. 그 외에 '사인'이란 약재는 생강과 식물로 맵고 따뜻해 위장을 데워주며 여름철 떨어진 입맛을 되찾는 데 효험이 있다. 초과 또한 생강과의 따뜻한 식물인데, 헛배 증상과 냉기를 없애고 과일이나 술을 많이 먹고 생긴 복통을 치료하는 데 주로 썼다.

 

처방에 들어간 4가지 약재의 약효로 보면 영조가 먹은 '제호탕'은 찬 과일이나 음료를 많이 먹고 생긴 설사병이나 입맛 떨어짐 등 여름 위장병을 치료하는 데 쓰인 약식(藥食) 임을 알 수 있다. 요즘 유행하는 '겉바속촉'의 음식이 아니라 겉은 차갑고 속은 따뜻하게 해주는 '겉차속따'의 진정한 군자의 여름 음료였던 셈이다.

 

지금처럼 양약이 없던 저 시대에는 환경에 맞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약을 만들어 먹었다. 그저 구하기 힘들고 만들기 어려워서 그렇지 선조들의 지혜는 따라갈 수가 없구나. 갖가지 열매와 같은 재료들에서 어떻게 그런 효능이 있는지, 하나하나 연구하고 공부하고 했을 것 아니겠는가?

지금도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것도 없던 저 시대의 선조들이 더 대단하고 똑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