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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4.06.20 - 인종차별 피해 미국을 떠난 화가

[나는 역사다] 헨리 오사와 태너(1859~1937)

 

어머니는 흑인 노예였다고 한다. 목숨 걸고 탈출하여 자유로운 시민이 됐다. 아버지는 흑인 교회의 성직자였다. 헨리 오사와 태너는 1859년 6월 21일에 미국에서 태어났다. 펜실베니아 미술 학교에 갔는데 흑인 학생을 도제로 받아주는 백인 선생님을 찾기 힘들었다. 미술 학교를 졸업한 다음에는 흑인 화가라며 차별을 받았다. 미국에서 더는 못 살고 1891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프랑스에 정착해 그린 초기 작품은 미국 흑인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었다. 푸른색을 듬뿍 썼는데도 그림은 따뜻하다. 1893년에 그린 '밴조 수업'은 할아버지가 손주를 무릎에 앉히고 밴조 타는 법을 가르쳐주는 작품이다. 밴조는 흑인이 즐겨 연주하던 악기. 1894년에는 '가난한 사람의 감사 기도'를 그렸다. 흑인 노인과 소년이 조촐한 식탁에 앉아 감사 기도를 드리는 그림.

 

1890년대 후반부터 종교화를 많이 그렸다. 1896년에 그린 '나사로의 부활'로 프랑스 미술계의 인정을 받았다. 그때는 종교화와 역사화가 인정받던 시대였다. 1898년 작품 '수태고지'는 태너의 대표작. 빛과 어둠의 대비가 종교적인 감동을 준다.

 

20세기에는 상징주의 사조를 받아들였다. '무언가 말하는 듯한데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모를' 알쏭달쏭한 그림이 상징주의 회화다. 1919년에 그린 푸른빛의 '개선문' 그림은 신비롭다. 1차 대전 때 죽은 프랑스 군인을 추모하는 작품이다. 1923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초기에는 흑인의 삶을 많이 그렸다. 나중에는 성서를 소재로 그림을 그리며 작품에 흑인이 줄었다. 성서에 흑인이 좀처럼 나오지 않아서일까. 한편 태너 스스로는 자신을 흑인 화가로 규정짓는 일을 거부했다. 인종을 초월하여 인간 보편의 가치를 탐구하는 화가가 되려고 했다. 종교화와 역사화와 상징주의 회화를 많이 그린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미술의 이쪽 흐름은 20세기를 지나며 잊혔다. 태너가 오늘날 기억되는 까닭은 국제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흑인 화가였던 이유가 크다.

 

 

흑인으로서 차별 받아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서 화가로서 이름을 떨쳤지만 흑인 화가로 규정 짓는 걸 거부했다는데 결국은 최초의 흑인 화가로 기억 되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