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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4.02.18 - [이주은의 유리창 너머] 인생, 멀리보기와 가까이 보기

인생은 부분은 보여도, 전체는 한눈에 파악하기 어렯다. 산에 올라가고 있으면서도 산 전체를 바라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건 오직 발 앞에 놓인 돌계단뿐이다. 하지만 반복적인 시간이 모여서, 발 디딘 자리에 조금씩 흔적을 남기고,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전체 인생이라는 커다란 형상을 이루어 간다는 것은 분명하다. 누군가의 빛나는 인생도 행운권 당첨처럼 한 방에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한톨 한톨 축적된 것 아니겠는가. 이동재(1974년생) 작가가 제작한 '이콘-부처'를 보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작은 쌀알들이 황금으로 빛나는 부처의 얼굴 하나를 구성한 작품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빛나는 인생일지라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힘겨운 인내로 가득하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동재는 황금이라는 이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하고 영구적인 재료를 써서 경주 석굴암 보존불의 온화하고 자애로운 얼굴을 만들었다. 물질적으로나 영적으로나 고귀한 빛을 머금은 얼굴이다. 그러나 작품에 한 걸음 다가가면, 쌀알을 수공예로 일일이 다듬어 붙인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보인다. 이 쌀알들은 빛나는 인생을 얻기 위해 맺혔음을 땀방울을 암시하는 듯하다,

 

물질적 값어치를 모를지라도 황금은 그 광채 자체가 아름답다. 그리고 석굴암 본존불의 표정은 반드시 불교도가 아닐지라도 누가 봐도 은혜로운 인상이기도 하다. 쌀도 허름한 재료는 아니다. 하폐경제 이전에는 곡식으로 노동의 대가를 지불받ㄷ기도 했고, 곡식 수확량으로 땅의 값어치를 매기기도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동재가 제시한 빛나는 얼굴은 황금처럼 변치 않고, 쌀처럼 풍요로우며, 부처처럼 만인을 위한 미소의 경지에 이른, 우리가 목표고 삼는 이상적인 인생의 모습이다.

 

이렇듯 '이콘-부처'를 통해 이동재는 인간이 추구하는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단계에서 그치지만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보편적인 가치가 과연 견고한 것인가에 대한 의심도 제기하고 있다. 번쩍이는 작품의 실상을 보라. 캔버스 위에 금박을 입힌 얄팍한 표피일 뿐이다. 우리가 보편적 가치라고 믿는 것도 혹시 겉모습만 그럴듯한 상태로 약하게 발려있는 게 아닐까? 표면을 파헤치면 어떤 밑바닥이 드러날지,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을 것이다. 지금이 딱 좋은데 굳이 표면을 긁어낼 이유는 또 무엇이겠는가.

 

무라타 사야카의 신간 '신앙'을 읽었다. 2016년에 '편의점 인간'을 발표하여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야망 없이 무력해진 청년 세대를 묘사했던 작가다. 단편 모음인 '신앙'에서는 글 여기저기에서 우리가 살면서 불현듯, '내가 믿는 것이 올바른가?'하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순간을 다룬다. 그 순간 무너지는 사람도 있다. 무라타의 글이 겨냥하는 곳은 바로 신념이 붕괴하는 그 지점이다. 예를 들어 첫 단편인 표제작을 보면, 모든 물건의 재료비와 가성비를 따져서 현실적인 가격을 현명하게 계산할 줄 아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의 기준을 볼 때 주변 지인들은 남에게 속거나 자기 환상에 빠져 쓸데없는 돈을 낭비하는 족속이다. 그런데, 그가 매긴 현실적인 값어치는 속임과 환상으로부터 만인을 구원해 줄 진리가 될 수 있을까.

 

주입돼왔건 스스로 믿어온 것이든 '신념'이라는 것이 요즘 일본인들 사이에서 화두인 듯하다. 올바른 규범이라는 경계선을 넘지 말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것이 절대적 선이라는, 지금까지 그들의 삶을 이끌어왔던 믿음에 균열이 가기 시작한 모양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2023)'이라는 영화에서도 마을 사람들 각자 내면에 지닌 원칙이 누군가를 암묵적으로 해로운 괴물로 몰고 간다. 그러나 우리가 예상하는, 어둠 속에 억압되어 있다가 분노하듯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끔찍한 괴물은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전체라는 평균적인 이상을 위해서 쌀알 같은 낱낱의 개인을 묵인해 버린려는 조용하고 평범한 이들이, 실상 괴물이던 것이다.

 

자신을 지탱해 준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고 흩어지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사람들은 여태 해 왔던 노력을 멈추지 않으며, 영원하고 절대적인 이상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니 공양미를 바치듯 애쓴 개인의 땀방울과 그것으로 이루어진 평온하게 빛나는 거룩한 미소는 비극과 희극이 공존하는 우리 인생의 참모습의 아닐까.

 

얼마전 아는 선배로 부터 '너는 여전히 빛나는 삶을 사네' 라는 말을 들었다. 이것은 완전 나랑 정반대의 말이다. 

내가 여행 가는 것을 좋아해 가족들이랑 종종 여행을 가는데 그걸 보고 그렇게 말하나 싶다. 해외든 국내든 남들보다는 많이 다녔으니 그 선배의 눈엔 그렇게 보일 수 있겠다 싶다. 더욱이 여행을 자주 가지 못하는 선배 눈에는 말이다.

난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라고 선배한테 답장을 하려다가 그냥 두았다. 누군가는 나를 저런 식으로 좋게 봐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서 말이다.

사실 난 아주 우울하고 외롭고 부정으로 가득찬 사람이다. 하는 일은 잘 풀리지 않아 매일 울상으로 지낸다. 

이런 부정적인 모습은 자주 보지 않으면 모를 수밖에 없다. 일부러 말하지 않는 한 말이다. 아주 친한 사이 아니고선 나의 단점을 굳이 끄집어 낼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어쨌든 누군가의 눈에는 내 모습이 저렇게 보이는게 그리 나쁘진 않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