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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4.08.12 - [시선] 지구를 살리는 영웅이라고?

서정홍 산골 농부

 

이웃 마을의 시를 좋아하는 중학생 우진이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시원한 매실차를 마시며 우진이가 물었다. "봄날샘 집엔 농기계가 하나도 없네요? 왜 힘들게 맨날 손으로 농사지으세요? 요즘은 편리하고 빠른 농기계가 많잖아요?" "우진아, 대답을 들으려면 밭으로 가야 하는데 괜찮겠냐? 참, 봄날샘은 농기계가 필요할 때는 빌려 쓴단다."

 

나는 우진이를 데리고 산밭으로 걸어갔다. 날씨가 얼마나 더운지 5분 거리가 마치 50분 거리 같았다. '우진이는 어떤 생각을 하며 걸을까? 이렇게 더운 날, 꼭 산밭까지 가야 하나? 속으로 투덜거리는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우습게 느껴졌다. 하지만 우진이가 던진 질문은 집 안에서 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진아, 여기는 봄날샘이 돌보는 산밭이란다. 어떤 작물이 자라고 있을까?" "봄날샘, 저기 다랑논 아래나뭇가지를 타고 다니는 저녀석은 호박과 오이고요. 그 아래 옥수수, 들깨, 고추, 대파, 이파리가 큰 저 녀석은 토란이에요." " 우와, 우진이가 중학생이 되더니 아는 게 많구먼." "그럼 대추나무 있는 쪽으로 가볼까?" "으음, 이건 땅콩, 가지, 방울토마토예요. 아아, 여기도 고추가 있네요. 봄날샘, 고추를 왜 이쪽에도 심고 저쪽에도 심나요?" "좋은 질문이야. 때론 대답보다 질문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되기도 하거든." "고추를 같은 밭에 나란히 심으면 일하기도 편하고 능률도 오르잖아요."

 

"아참, 오늘 그 이야기를 하려고 산밭에 왔지. 우진아, 만일 말이야. 같은 밭에 한 가지 작물만 심으면 어떤 일이 생길까? 궁금하지? 코로나19처럼 식구 가운데 한 사람이 걸리면 대부분 다 걸리잖아. 작물도 같은 이치야.

 

한 가지 보기를 들면 말이야. 날이 갈수록 지구촌에 벌이 줄어 양봉 농가들이 먹고살 길이 없다고 하잖아. 같은 밭에 한 가지 작물만 심으면 꽃이 피고 지는 때도 같잖아. 그러니까 벌이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시기도 ㅉ랍아지느 ㄴ거지. 벌이 줄어드는 까닭이 오염된 환경과 기후변화, 독한 농약 탓도 있겠지만 말이야. 학자들은 대농처럼 밭에 한 가지 작물을 심는 탓도 있다고 해. 봄날샘은 소농이라 밭에 여러 가지 작물을 심으니까 심고 거두는 때가 달라. 그러니까 꽃이 피고 지는 시기가 달라 벌과 나비가 많아." "봄날샘, 학교에서 배웠어요. 지구 살리는 영웅은 소농이라고요."

 

"우진이가 소농을 다 알고 기특하네. 지금은 대농도 필요하지. 넓은 땅과 농기계가 없으면 당장 식량이 줄어들어 큰일 날 테니까. 그렇지만 우리 모두 깨끗하고 아름다운 세상에서 건강하게 살려면 소농이 늘어나야겠지. 농부들이 독한 농약과 화학비료와 비닐을 쓰지 않고도, 빚을 내어 비싼 농기계를 사지 않고도, 먹고살 수 있도록 지원도 해야겠지. 그 무엇보다 자연을 벗 삼아 소박하게 살려는 청년 농부가 늘어나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봄날샘, 소농을 존중하고 소농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지원을 하면 좋겠어요. 그리고 소농을 불타는 지구를 살리는 '마지막 희망'으로 여기고 응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그래야만 청년들이 마음 놓고 소농을 선택하지 않을까요?" 중학생이 마치 대학생 같은 질문을 쏟아내는 우진이를 보면서 사는 맛이 나고 부쩍 부쩍 힘이 난다.

 

중학생이 이런 대화를 한다는게 놀랍다. 나의 조카도 중학생인데 맨날 유튜브에 게임만 하고 저런 것에 관심이 전혀 없어 저런 대화는 불가능하다. 

아마도 사는 환경이 달라서 그런걸까? 아니면 그런 대화를 할 기회가 없어서일까? 

요즘 청소년들은 전자기기에 빠져서 SNS나 게임이나 하지 농사, 아니 농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저런 자연에 관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 중학생 우진이가 더 기특하게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