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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경제 24.08.07 - [시로 여는 수요일] 완행열차

ㅣ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들국화

애틋이 숨어 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시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 모를 뻔하였지.

 

아메키라 원주민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가 이따금 멈추어서 뒤를 돌아보곤 했다고 한다. 너무 빨리 달려온 탓에 영혼이 쫓아오지 못할까 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는 우리들은, 기차를 타거나 비행기를 타고 먼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손바닥 안의 메타버스 플랫폼을 서성거리는 현대인들은 자기 영혼을 어느 정류장에 두고 왔는지 정확히 기억할까? 문명은 속도를 숭배하고, 속도는 풍경을 지운다. 삶이 고해라서 광속으로 탈출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면 '천천히, '누비듯이', '홈질하듯이' 인생의 모퉁이를 누려야 하지 않겠는가. 달리는 자는 도착하지 못한 자이고, 거니는 자는 이미 도착한 자이다. <시인 반칠환>

 

약 20여년 전 동생과 유럽여행을 했을 때 독일 뮌헨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넘어가는 기차를 탔다. 물론 이 기차는 완행은 아니지만 빠른 속도에도 불구하고 기차 밖 풍경은 잘 볼 수 있었다. 

기차가 열심히 달리더니 갑자기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린다-  빽스티치(맞는 표현인가 모르겠다.) 그런데 그 곳의 풍경이 너무 예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사진 찍을 생각조차 못했다. 너무 예뻐서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피곤했는지 9시간가량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잠만 잤을 뿐이다. 깨우기 그래서 혼자 눈으로 담았다. 가끔 동생에게 그때 참 예뻤는데 넌 자고 있었서 못 봤다고 이야기하며 나 혼자만의 추억을 곱씹을 뿐이다. 이 글을 읽으니 그때 풍경이 생각난다.

 

간이 역하면 떠오르는 곳이 있는데 코스모스로 유명한 북촌역이다. 하동 근처에 있는 역인데(오래되어서 기억이 잘 안 난다) 부산에서 무궁화를 타면 약 세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가을에 가면 코스모스가 만발해서 관광지 같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기억에 남는걸 보니 아주 좋았던 것 같다. 간이역 특유의 정감 가는 분위기에 코스모스까지 더해져 특색 있는 곳이 되었다.  지금도 코스모스가 만발하는지 관광객이 여전히 많은지 잘 모르겠지만 간이역 하면 그곳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