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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24.07.12 - 그 사람의 진면목[살며 생각하며]

권석만 서울대 심리학과 명예교수

인간은 위장술이 가장 능한 존재

예쁘게 화장하고 근사하게 치장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가정에서 진면목 가장 잘 드러나

큰 자가 작게, 작은 자가 큰 자 돼

배우자로부터 존경받는 게 진짜

 

샤워만으로는 묵은 때를 벗기기 어려워 오랜만에 동네 목욕탕을 다녀왔다. 뜨끈한 욕탕에 깊숙이 몸을 담그고 여유로움을 즐기면서 목욕탕은 참으로 특별한 삶의 상황이라는 생각을 했다. 목욕탕에서는 사회적 신분이 뭐든 누구나 옷을 벗고 알몸이 되어 서로의 육체적 진면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어쩌면 목욕탕은 모든 사람이 가식을 벗고 자기 모습을 가장 정직하게 보여주는 공간인지 모른다.

 

인간은 위장술이 능한 존재다. 가장 교묘하고 복잡한 속임수 전략을 구사하는 위장술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화장으로 얼굴을 예쁘게 위장하고, 옷으로 몸을 근사하게 치장한다. 웃는 얼굴로 적개심을 감추고, 허장성세로 초라함을 가린다. 이처럼 사람들은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못나도 잘난 척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백조처럼 수면 위로는 우아한 모습을 보이지만 수면 아래로는 정신없이 물갈퀴질을 하는 이중적인 존재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의 진심, 즉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속마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나타내는 사람도 많다. 연애할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헌신하던 사람이 결혼하고 나면 자기중심적인 인간으로 돌변한다. 우리 사회에는 달콤한 말과 친절한 행동으로 접근하여 다른 사람의 돈을 빼앗아 가는 사기꾼이 참으로 많다.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며 투쟁하던 사람이 권력을 차지하고 나서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실망하고 배신감을 느낄 때가 많다.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변화무쌍한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인 자기제시이론(self-presentation theory)에 따르면, 인생은 연극이고 세상은 무대이며 모든 남자와 여자는 배우다. 개인은 다른 사람들 즉 청중에게 보여주려는 자기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그 이미지를 청중에게 제시하기 위해 연기하는 것이 사회적 행동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사회적 역할과 청중의 유형에 따라 각기 다른 이미지를 제시하며 연기하게 된다. 예컨대, 조직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의 이미지를 제시하기 위해 부하 직원에게 단호한 행동을 나타내는 사람이, 가정에서는 자상한 가장의 이미지를 제시하기 위해 배우자나 자녀에게 나긋나긋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다. 한 사람이 여러 상황에서 행동하는 모습을 관찰하면, 그가 나타내는 다양한 모습에 다중성격자가 아닌지 의심하게 될 것이다. 특히, 매스컴을 통해 접하는 유명인의 모습은 그들이 대중에게 보여주려는 이미지일 뿐 그들의 진면목과는 거리가 멀다. 사람들이 진정하 자기 모습을 내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내보였을 때 보게 될 피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시하고 거부하거나 집단에서 소외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인정을 중시하고 거부의 두려움이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위장하여 제시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 영웅호걸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사람 앞에서는 겁쟁이가 되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을 긍정적인 모습으로 제시해 이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익을 취하려는 욕망이 강할수록 자신을 위선적으로 제시하려는 동기가 강해진다. 그래서 부하 직원은 인사권을 지닌 상상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어렵다. 인생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큰 권력과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일수록 남에 대한 의심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타인의 친절한 행동이 진짜 호의인지 아니면 자신의 돈과 권력을 이용하기 위한 가짜 호의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명인이든 일반인이든 그 사람의 진면목을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자기제시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두 가지의 상황에서 위장의 가면을 벗는다. 하나는, 위장할 여유가 없는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다. 침몰하는 배에서 약자를 구명선에 먼저 태우며 양보하는 사람도 있고, 약자를 밀쳐내고 자신이 먼저 타는 사람도 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은 순탄할 때보다 고난과 역경의 위기 상황에서 더 잘 드러난다.

 

또 하나는, 행동의 자유가 많아서 위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권력과 재력은 개인의 욕망을 드러내는 행동의 자유가 증가함을 의미한다. 권력을 잡으면, 반대자를 숙청하거나 사리사욕을 채우는 일에 집중하는 정치인이 있는 반면, 자신을 핍박했던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검소한 삶을 지속하는 정치인도 있다. 정치인이든 일반인이든 무엇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 돈과 권력을 사용하는지를 관할하면, 그의 진면목을 가늠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진면목이 가장 잘 드러나는 상황은 가정이다. 가정은 타인의 평가를 염려해야 하는 사회적 압력이 적은 곳이기 때문에 가장 편안한 곳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기도 하다. 인격자로 존경받는 사람이 가정에서는 폭력을 휘두르는 경우도 있고, 호랑이 같은 사람이 가정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경우도 있다. 가정은 큰 자가 작아지기도 하고 작은 자가 커지기도 하는 곳이다. 한 사람의 진면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오랜 기간 우여곡절을 함께 겪어온 배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배우자로부터 진정한 애정과 존경을 받기가 그토록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누구나 다 그렇다. 밖에서 나의 모습과 안에서 나의 모습은 다르다. 상황에 맞게 가면을 바꿔 쓴다. 거의 대부분은 가면의 차이가 그닥 크지는 않다. 그냥 이런 모습도 저런 모습도 있다는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가면의 차이가 큰 사람은 웬만해서 피해야 한다. 앞에선 착한 척 뒤에선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이중인격자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가면의 차이가 잘 드러나지 않아 우린 구별할 수가 없다. 작정하고 속이면 속아 넘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사람 보는 눈을 기르는 내공을 쌓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