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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24.02.02 - [살며 사랑하며] 선물은 이야기를 주는 것

서울 서대문구청 앞마당에 '설맞이 직거래장터'가 열려 북적북적했다. 인삼튀김, 감자만두, 굴비 등 품목도 다양했다. 뜻밖에 시골 오일장이라도 발견한 듯 신이 났다. 노란 콩고물을 묻힌 모시떡을 먹다가 어릴 적 심부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명절 대목을 앞두고 엄마는 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만들었다. 한 움큼 짚을 다듬어 가지런히 깐 뒤, 유정란을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사이사이에 짚을 끼워 단단히 묶었다. 손잡이는 볏짚을 세 가닥으로 갈라 머리카락을 땋듯이 꼬아 만들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엄마가 종삼이네 집에 달걀꾸러미를 가져다주라고 했다. 종삼이는 같은 반 남학생이었다. 나는 심부름하기 싫어 투덜거렸다. 그 애와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마주치면 쑥스러울 것 같았다.

 

종삼이네 집에 다다랐을 때, 대문 틈 사이로 종삼이가 보였다. 쭈뼛거리며 심부름을 왔다고 말하자 종삼이가 마당에서 자기 엄마를 불렀다. 방문이 열렸다. 종삼이 엄마의 비술은 검었고 백발이었다. 한눈에 봐도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종삼이는 묵묵히 몸이 불편한 엄마를 부축했다. 종삼이 엄마가 고맙다면서 광에서 뭘 꺼내왔다. 불룩한 콩 자루였다. 콩 자루를 안고 집으로 가면서, 전에는 몰랐던 종삼이의 일면을 보게 된 것 같았다. 그저 조용한 아이인 줄 알았는데, 한 마디 불평 없이 엄마를 보필하는 모습이 어른스러워 보였다.

 

엄마의 달걀 꾸러미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이야기를 쓰지 못했을 것이다. 선물하는 마음은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주는 것인가 보다. 덕분에 나는 알처럼 동그랗고 따스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게 되었다. 종삼이 엄마는 건강을 회복했을까? 차가고 어엿했던  종삼이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회상에 젖고 보니 직거래 장터에서 산 먹거리를 나누고 싶은 친구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 어릴 때도 엄마가 명절이면 이웃주민들한테 달걀을 선물했던게 기억난다. 짚으로 달걀 꾸러미를 엮던 세대는 아니라 그렇게까지는 아니고 계란 한 판 사서 선물을 하였다. 왜 계란 선물을 하느냐고 물었더니 명절엔 다들 음식을 하기 때문에 계란이 많이 쓰인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적절한 시기에 딱 필요한 선물이지 싶다.

선물이란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걸 사줄 때 받는 사람도 주는 사람도 더 기분이 좋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