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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24.06.12 -그때 그 시절이 그립습니까?[김현아의 우연한 연결]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서 폭력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외침에 근거가 생겼고 덕분에 저는 학생을 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 상식이 된 학교 현장에서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러해야 할 근거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김현아(작가, 로드스꼴로 대표교사)

 

그 친구가 왜 맞았는지는 생각이  안 나지만 그날 입었던 옷은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감색 점퍼에 고동색 운동복 바지였다. 처음엔 서서 맞다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 다음엔 바닥에 누운 채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맞았다. 선생님의 표정도 생각이 난다. 아이를 밟고 차며 분노에 차 있는 모습이다. 40년도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그날 그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그렇게까지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겨우 열살이 그렇게까지 맞을 일이 도대체 무엇이랴. 이름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맞은 아이도 때린 선생님도. 교실을 압도했던 하얀 침묵과 투명한 공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다.

 

중학교 2학년 한문 시간이었다. 시험을 봤고 틀린 개수만큼 맞았다. 칠판 아래 분필 두는 대를 잡으면 길고 팔뚝만한 막대기로 한문 선생님이 철썩철썩 엉덩이를 때렸다. 하얀색 블라우스와 검은색 플리츠 스커트를 입은 친구들이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펄럭펄럭, 맞을 때마다 치마가 나부꼈다. 어떤 친구들은 속바지가 보일까 봐 양손으로 스커트 자락을 꼭 쥐고 맞느라 손을 맞기도 했다. 내 순서가 되었고 몇대인가를 맞았다. 나는 오언율시도 칠언절구도 태백도 두부도 좋아했으므로 한문 시험을 잘 보는 편이었는데 50점 이하의 점수가 나왔다. 놀라운 건 내 점수가 반에서 제일 높았다는 거다. 시험의 난이도가 문제였다고 지금은 생각하지만 당시엔 어떻게 하면 자존심을 안 다치고 맞을까 고민했다. 70명에 가까운 중학교 여학생들을 다 때리느라 선생님도 나중엔 지쳤으리라. 1981년의 일이다. 그 선생님의 이름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친구는 매달리기를 할 때 선생님이 엉덩이를 잡은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두 손으로 철봉을 잡고 있는라 무방비 상태의 몸을 그가 만졌을 때 어찌나 불쾌하던지 세월이 가도 문득문득 생각난단다. 다른 여학생들이 매달리기를 하는 동안 허리도 잡고 가슴 언저리도 잡는 것으로 악명 높은 사람이었다니 우연한 일은 아니었던 게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생각나는 게 있다. 달리기 출발 자세, 그러니깐 양손을 바닥에 붙이고 엉덩이를 들어 신호 소리를 기다리고 있을 때 양손으로 허리를 꽉 잡았던 체육 선생님.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자세 좋아, 하는 말과 함께. 어쩐지 기분이 더러웠지만 딱히 뭐라할 말도 없이 넘어갔으나 아주 가끔 생각나곤 한다. 여전히 불쾌한 걸 보면 교육적 행동은 아니었다고 분명히 생각한다.

 

학창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면 때리고 맞은 이야기가 자연스레 딸려 나온다. 출석부 모서리로 쿡쿡 찌르며 이야기하는 선생님, 지휘봉으로 때리는 선생님, 신고 있던 슬리퍼를 벗어 뺨을 때리는 선생님, 그 뿐이랴, 지각했다고 오리걸음, 복도 뛰었다고 원산폭겨(뒷짐을 진 채로 허리를 굽혀 머리를 땅에 박으라는 구령이나 동작, 맙소사 사전에도 나오는 말이다), 준비물 안 가져왔다고 쪼그려 뛰기, 반 성적이 나쁘다고 모두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 꿇고 앉아 있기, 문제 못 풀었다고 수학책 입에 물고 있기 등등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혹 행위임에 분명한 일들이 매일매일 학교에서 벌어지곤 했다. 그나마 여학교는 덜한 것이라는 걸 사촌 동생과 이야기하며 알게 됐다. 

 

나보다 두살 아래인 사촌 남동생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고 했다. 빗자루며 대걸레 자루며 야구방방이며 맨손이며 선생님들은 닥치는 대로 학생들을 때렸단다. 남자 중학교, 남자 고등학교는 폭력이 난무하는 현장이었다고, 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조차 불편하고 불쵀하다고 했다. 그가 이민을 간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 학교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싶지 않다고. 물론 20년 전 이야기다.

 

학생인권조례는 이런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다. 물론 좋은 선생님이 훨씬 많고 다정한 교사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는 종종 억울하게 맞고 얻어터지고 걷어차였다. 특히 공부를 못하거나 가난한 친구들은 온갖 종류의 모멸을 견뎌야 했다. 한번은 국어 선생님이 점수가 쓰인 채점지를 나누어 주며 한 친구에게 말했다. 네가 나랑 같은 이름을 가진 것이 부끄럽다, 내 이름을 더럽히지 마라. 얼굴이 하얗고 말이 없고 도시락을 혼자 먹던 친구였다. 내 학창 시절의 이야기다.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는 날, 일요글방에 나온 한채민 교사의 글을 읽으며 울컥, 니난날이 떠올랐다. 8년차 교사인 그이는 학생인권을 교권과 대립 구도로 바라보는 지긋지긋한 프레임에 신물이 난다고 했다. 교사인 자신에게도 학생인권조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교사가 학생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여학생들은 지정된 색상의 속옷을 입어야 하며, 체벌이 '사랑의매'나 '체력단련

으로 둔갑할 시절을 지나, 2012년 서울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되면서 폭력은 사랑이 될 수 없다는 외침에 근거가 새겼고 덕분에 저는 학생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 된 학교 현장에서 안전하게 노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느 ㄴ그러해야 할 근거들을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학생들에게 교권을 존중하라고 하면서 여러분의 인권은 폐지되었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어렵게 어렵게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된 것은 2010년께다. 조례라는 것이 지방의회 의결로 제정되는 지방자치법령이라 2010년에 경기, 2011년에 광주에 이어 2012년에 서울에서도 학생인권조례가 제정됐다. 2024년 4월26일 서울시의회는 학생인권조례폐지안을 통과시켰다. 학생인권조례의 당사자인 학생들한테 의사를 묻는 절차도 없이 진행됐따. 서울시의회는 교육 현장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이라고 학생인권조례를 규정했다. 때리지 말라, 두발을 규제하지 말라, 강제야간자율학습을 멈춰라, 학생인권조례가 만들어지던 시절 학생들의 요구였다. '교육공동체의 한 구성원의 인권을 지우는 방법으로느 ㄴ다른 구성원의 인권 역시 지킬 수 없다.' 조례 폐지를 규탄하는 교사들의 성명문 중 일부다.

 

6월 10일 시작하는 서울시의회 정기회에서 서울학생인권조례폐지안에 대한 재의결이 진행될 것이라 한다. 의원들이 자신들의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립습니까?

 

 

서울시의회에 앉아 있는 의원들은 그런 학창시절을 겪어 왔어도 있는 집 자식들이라 자기들은 안 당했겠지. 그러니 꼰대 마인드로 학생들에게 무슨 인권이냐며 폐지하려고 하는 거 아니겠나?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저런 일들이 비일비재했고 그냥 모두들 당연하게 생각했다.

단체기합부터 공부못한다고 때리고, 숙제안했다고 때리고, 문제 못푼다고 때리고 등등등 숱한 이유를 대며 때리곤 했다. 

여학교라 심한 폭력은 없었지만 맞으면 아플 정도의 매질은 종종 있었다.

특히 기억에 남는 건 고등학교 1학년 때 국어선생님의 폭력이다. 

무엇 때문에 선생님이 화가 난건지 모르겠지만 화가 나서 반전체에 뭐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분위기 엄숙하고 조용한 가운데 한 아이가 계속 비닐을 만지작 거리면서 시끄럽게 했다. 선생님은 참는 것 같았는데 그 소리가 계속 되자 결국 폭발하여 그 아이를 때렸다. 손으로 뺨을 인정사정없이 갈겼다. 그 아이는 넘어졌고 두어번 더 때린 걸로 안다.

저 선생님은 평소 인자하면서 한번씩 저렇게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마치 이중인격자처럼

후문엔 그 아이가 좀 사는 집 아이라 부모님이 찾아와 선생님한테 따졌는지 선생이 아이한테 사과를 했다는 소리를 듣긴 했는데 확실한 건 아니다.

어쨌든 요즘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난리가 날거다. 저렇게 무식하게 때리는 선생님도 없거니와 만약 있다면 학생들 다 들고 일어나 폭력 선생으로 경찰에 고발해야한다. 

만약 내 자식이(자식 없다) 저런 식으로 맞고 온다면 바로 경찰서 가서 선생 고소하고 앞으로 선생질 못하게 해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