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르바이트는 일본의 셀 애니메이션을 채색하는 일이었다. 구인정보지를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찾은 일자리였다. 긴장했던 것과 달리 면접은 수월했다. 사장이 대충 이력서를 훑어보더니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했다. 처음 사무실을 둘러봤을 때 나는 세상에 그렇게 많은 물감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노란색만 해도 50가지가 넘었다. '노랑' '누렁' '누르스름한' 등 다양한 언어로 색을 표현하듯이, 안료의 배합에 따라 미세한 '차이'로 표색한 세계였다.
사장은 '미지'라고 부르는 직원에게 "저 친구 일 좀 알려줘라"고 말하고 외근을 나갔다. 미지씨는 좀 귀찮은 내색이었다. "물감 번호 적힌 거 보이지? 선반에서 맞는 컬러 찾아서 뒷장에 색칠하면 돼. 안 삐져나오게." 나는 "미지씨, 고맙습니다"라고 꾸벅 인사했다. 직원끼리 부를 때는 이름 끝에 '씨'자를 붙여야 한다고, 언젠가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책으로 배운 셈이다. 그는 뜨악하게 나를 보았다. 그때만 해도 나이가 곱절은 어려 보이는 신참이 '씨'를 붙여가며 이름 부르는 게 못마땅했을 것이다. 나는 미지씨와 친해지고 싶었는데, 그는 데면데면하게 나를 대했다. 독서실처럼 칸막이가 쳐진 사무실에서 사람들은 각자 채색에 몰두했다. 색칠하는 재미도 잠시, 물감 농도를 맞추는 게 까다로웠다. 하루 종일 물감 냄새를 맡으니 머리도 아프고, 트레이싱 보드 조명 때문에 눈이 시렸다.
며칠 뒤, 사장은 지금껏 채색한 작업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걸 보던 사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제조회사마다 물감 번호가 다른데, 엉뚱한 물감을 칠했다는 것이다. 손해 본 것을 갈음하고 나면 한 푼도 받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일을 그만뒀다. 서툴고 눈치 없었던 사회초년생 시절. 그때를 떠올리니 민망해 웃음이 난다.
사회초년생 때 누가 알려주지 않으면 모르는게 당연한거다. 그걸 알려주는 좋은 사수를 만나는 것도 복이라면 복이지.
나도 사회초년생 때 알바를 공공기관에서 했는데 어떤 분 한 분의 직급을 몰라서 뭐라 불러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그냥 ~씨라고 부른 적 있는데 부르면서도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모르니 어쩔 수가 없이 그렇게 불렀다. 물론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더라. 나중엔 그렇게 안 불렀지만 모르니 별 수 있나.
누군가가 살며시 알려주면 좋으련만 다들 자기 일 아니라고 모른척하니 알 길이 없다.
사회초년생한테 좀 너그럽게 대하고 많이 알려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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